기억2009. 9. 26. 15:05

 
  교회에서 미시간대학교 학부생들과 소모임을 하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은, 사람들이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면서 지낸다는 점이다. 친구와의 관계, 신앙생활에 대한 고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등 깊은 생각들을 나눈다. 정말 평범한 것들이고, 나도 그런 고민을 했었다는 것을 이 블로그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지금의 나는 그들과 공감하기 어려웠다. 지난 1~2년 동안 그런 생각을 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만 16세부터 18세까지, 여섯 학기 동안의 짧은 대학생활을 했었다.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둘은 너무 달랐다. 회상해보면 하나하나 좋은 추억들이고 전반기와 후반기 중 어느 하나가 더 좋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마지막 세 학기 동안의 삶은 나의 정신을 너무나도 피폐하게 만들어 놓았다.
  2006년 가을, 입학과 함께 학과를 선택해야할 기로에 놓였고, 깊은 고민 끝에 전자과로 진학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좋았고, 물리과나 수학과 과목을 들으면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얻으려고 했다. 카이스트 과학영재교육원에서 창의적인 강의자료를 만들고 수업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도전하기도 했다.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들을 맘껏 누릴 수 있어서 좋았고, 발전해가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반면 후반부는 앞으로 끌려가기만 한 느낌이다. 이제 생각해보면 정말 사람이 그렇게 해선 안될 짓이라고 느낄 정도이다. 이 블로그에 쓰는 글이 현저히 줄어든 것도 이 때부터이다. MCM대회에 출전하고, 실험과 URP를 포함한 21학점을 들으면서도 부전공 이수를 하겠답시고 수학과 과목을 듣고 실내악 수업에서 공연까지 했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논문 같지도 않은 URP논문을 쓰고 있어야 했다. 여름방학 내내 GRE를 공부해서 겨우 점수를 받고, 이리저리 치여가며 여덟 군데에 원서를 내고, 그와중에 돈벌겠다고 CS101 조교에 무리한 웹개발 알바까지 하고.. 실험3은 사람을 정말 미치게 만들었고, 수학과 부전공학점을 채우면서 졸업요건을 채우느라 마지막 학기까지 생고생을 해야 했다.
  문제는, 그렇게 1년 반을 지내면서 사고가 급격히 기계적으로 변화했다는 점이다. 유학을 가기 위해 대회에 나가고 URP를 하고, GRE를 공부하고, 교수님들께 추천서를 부탁해서 지원을 하는 모든 과정이 기계적이었다. 그 때부턴 수업에서 배우는게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공부하는 것이 즐겁지도 않았다. 향후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색다른 분야에 대한 탐구 같은 것도 없었다.
  유학을 가고 싶어 하긴 했었다. 이미 충분히 기계적이었던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유학을 꿈꾼 것이 아니라, 국방의 의무 덕분에 취직을 할 수도 없고 24시간 갇혀살아야 하는 카이스트의 대학원생이 되긴 싫었기에 차선책으로서 유학을 희망했었다. 생활의 모든 것이 유학을 위한 내키지 않는 강제들이었고, 일주일에 두 번은 밤을 새게 만드는 실험 덕분에 마음의 안식처였던 오케스트라 활동도 하지 못한 채 대학생활의 후반부를 마무리지었다.


  이곳은, 정말 여유롭다. 한 주에 열시간의 수업이 있는 걸 보고 학과 담당자가 너무 힘들지 않겠냐고 걱정을 할 정도로 사람들의 인식이 다르다. 다시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은 의욕이 생기고 있고, 수업도 재미있다. 어쩌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던 나를 벗어나 이런 생활이 허락되었다는 것에 너무 기뻐서 장학금이 발표되던 날 혼자 그렇게 오래 울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시간적 여유는 생겼지만, 그간 돌보지 못했던 생각의 여유는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겨우 이 정도의 생각을 짜내는 데 한시간이 넘게 걸렸고 그나마 무슨 말을 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남은 2009년은 대학생활 전반부의 나와 같이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jongw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