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2005. 2. 28. 22:18
일의 발단은 대략 이렇다.
오늘 아침에 내 방 책상 앞에 앉아있는데, 외출했던 동생과 어머니가 돌아오면서 닫혀 있던 내 방문을 열고 'ただいま'를 외쳤다.
평화로운 여느 가정집의 일상..이다.
그런데 동생과 어머니가 방에서 나가면서 방문을 닫지 않았다.
책상에서 방문까지는 대략 2m가량 떨어져있다.

최근 사회에 만연하기 시작한 풍조에 적극 동참하기로 마음먹은 나로서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 거리를 걸어가서 팔을 움직여 방문을 닫는다는 행위가 지극히 비효율적인, 일테면 비커에 과산화수소수를 담아놓고 이산화망간을 넣지 않은 채로 산소가 해리되기만 마냥 기다리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뭔가 내 팔의 기능을 확장시킬 도구를 이용해 방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이 경우 팔이 수행할 작업을 대신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책상 위에 돌아다니고 있던, 엄지손가락 기절골만한 플라스틱 지우개였다.
토크는 회전축에서 멀수록 커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므로, 적당히 경첩에서 먼 부분을 지우개로 때리면 문이 돌아갈 것도 같았다.

그 첫 번째 시도에서, 지우개가 방문 손잡이 언저리에 맞고 '통'하는 소리와 함께 충돌지점으로부터 약 1m가량 되는 위치로 튕겨 나오긴 했으나, 문이 움직이지는 않았다.
분명 모멘트팔이 가장 긴 위치에 힘이 작용했고, 되튐으로써 더 많은 운동량을 전달했을텐데 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몹시 아이러니했다.

여기까지가 실험 동기가 되겠다. '오기'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떨어진 지우개를 집어들고(여기에 소비한 에너지로 차라리 문을 닫았더라면..) 방문을 향해 5차례 정도 지우개를 던져 보았으나 그 중 2번은 빗나간 지우개가 방 건너편의 화장실로 날아갔으며, 다른 3번의 시도에서도 문이 움직이지 않는 대신 요란한 충돌음이 발생했다.

그리고 충돌 과정에서 큰 소리가 난다는 사실에 착안, 운동에너지의 대부분이 소리의 형태로 손실되는게 아닐까? 하고 추측해서 대부분 밤에만 사용하는 메모리폼 베개를 약간 다른 용도로 사용해 보았더니, 이번에는 군말없이 문이 스르르 닫혔다.

그러나 베개의 큰 크기때문에 지우개와 달리 양 손으로 잡고 던질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 투척 방법이 실험군과 대조군 사이의 차이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문을 다시 열어둔 채(이미 원래의 목적은 망각했다)지우개를 양손으로 힘껏 던져보았더니 지우개가 문 중앙에 맞으며 엄청난 소리를 냈다. 물론 문은 닫히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도 이 차이는 메모리폼과 지우개의 분자 구조와 밀도의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이번에는 베개와 질량이 비슷하되 딱딱한 물건을 던져보기로 했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총균쇠와 영한사전이 적당할 것 같았지만 이게 나무문에 맞았다가는 지우개와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거대한 파동을 공기중에 발생시킬 뿐더러 심한 경우 종이나 나무, 둘 중 하나가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을 것 같아 그것보다 약간 작은 가죽 수첩과 디카 케이스를 차례로 집어던졌다.

이것은 온 가족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는 기능으로서는 나무랄 데 없는 효능을 보여주었다. 덧붙이자면 행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기능도 뛰어나다. 참고로 수첩은 문을 닫았으며, 디카 케이스는 지우개와 똑같은 결과를 보였다.

결국 '문은 자기 손으로 닫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라는 교훈과 함께 정석책을 끌어안고 책상에 도로 앉았으나, 지우개와 수첩이 왜 문을 닫는 일에 대해서 차이를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halliday 일반물리책을 꺼내서 - 먼지를 털고 - 지우개와 문의 충돌에 관한 계산을 시도했다.

30cm자와 엄지손톱으로 측정한(줄자가 없었다) 문의 크기는 84*202*3(단위:cm)였다. 나무의 밀도를 0.5g/cm3라고 하고 문의 밀도가 어느 부분에서든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질량이 대략 25kg이 나왔다.

이것을 평판의 회전관성 공식(I=M(a^2+b^2)/12)에 대입하고 평행축 정리(I=Icom+Mh^2)를 써서 회전관성 I=6kg*m2를 얻었다.(할리데이님하가 도와주셨다)

그리고 지우개의 질량이 10g이라고 하고 속도가 충돌 순간까지 50m/s로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충돌 직전 회전축에 대한 지우개의 각운동량은 0.5kg*m2/s로, 대략 충돌 직후 문의 각속도는 0.08rad/s가 되어 무시할 정도의 수치가 되는 것 같았다.
한편 수첩이 지우개의 질량의 10배라고 하면 각속도는 0.8≒π/4 (rad/s)가 된다.

따라서 질량이 작아서 문을 닫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그러면 질량이 작아도 속도가 충분히 빠르다면 문을 닫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계산을 수행하는 사이 어머니가 다시 외출하셨으므로, 약간의 소음이 나더라도 실험은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까 던져진 지우개보다 더 빠른 속도를 만들어낼 능력은 없었으므로, 이번에도 도구의 힘을 빌려 보았다.

BB탄 총은 우리에게 통증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물건이다.(묶어서 해석해버리면 낭패)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은 비생산적인 방향으로 불거져 나온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두 번째 실험은 5발의 총알을 - Sig sauer의 탄창에는 최대 18발까지 들어가지만, BB탄 18발이 방문에 줄 데미지는 무시무시할 것 같았다 - 문의 가장자리를 향해 격발하는 것으로 계획했다. 그리고 BB탄이 방바닥으로 굴러감과 함께 문이 움직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 실험은 예상만큼 마냥 평화로운 결과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여섯 방향에서 방의 엔트로피를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그 소리를 만들어낸 주체인 지름 6mm짜리 플라스틱 구체는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두 번째 시도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두 번째 총알을 도로 회수했다는 일은 고무적이었지만 더 이상 실험을 계속할 마음은 없었다.

이상이 앞날이 창창한 17세 남학생이 한나절을 허비하게 된 사연의 전말이다.

이 실험에서 얻은 것은 -
가족들의 이상한 시선.
방구석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플라스틱 알갱이.

알게 된 것은 -
평판의 회전관성 공식과 평행축 정리.(아마 가장 쓸모있는 결과물일 것이다)
귀차니즘은 때로 엄청난 에너지 소비를 불러온다는 사실.
열린 방문은 직접 걸어가서 닫는 것이 최적의 솔루션이라는 사실.

나중에, 손으로 직접 문을 밀어보았다. 그리고 다음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손바닥이나, 주먹이나, 팔꿈치, 어깨 등 어느 신체부위로 밀어도 문은 닫힌다.
주먹으로 때리면 '쿵'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손가락으로 찔러도 문이 움직이긴 한다. 대신에 손가락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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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15기카페
Posted by jongwook